[찬드라의 경우]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 찬드라의 경우』는 1998년 KBS에서 방영된 옴니버스 형식의 단막극 시리즈 중 하나로,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인간의 집단심리, 믿음의 속성, 그리고 대중문화의 이중성을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풍자한 단편 영화입니다. B급 감성과 박찬욱 특유의 냉소적 유머가 조화를 이루며, 지금 다시 봐도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입니다. 2024년 현재, 사회와 미디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복잡해진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작은 영화는 외계인보다 더 기묘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다시 들춰보게 합니다.
믿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찬드라라는 허상
이 영화의 중심에는 한 외계인, 혹은 외계인 행세를 하는 존재 ‘찬드라’가 있습니다. 그는 공중부양을 하거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행동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가짜라는 의심을 받던 찬드라는 어느새 진짜 외계인으로 대중의 신뢰와 숭배를 받게 되고, 급기야 종교적 지도자처럼 취급됩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설정을 통해 믿음이란 증거보다 ‘욕망’에 의해 작동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찬드라가 외계인이길 원하고, 그 존재에 기대고 싶어 하며, 불확실한 현실보다 신비한 구원자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 믿음은 합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위협이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한 감정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외계인 풍자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 정치적 선동, 음모론 등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믿음을 선택하고 휘둘리는지에 대한 메타포로 읽힐 수 있습니다. 찬드라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를 보는 우리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 감정적으로 매달리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초기 실험정신과 풍자미학
『찬드라의 경우』는 박찬욱 감독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형식 속에서 감독의 미학적 세계관이 피어나는 초기작입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블랙코미디, 정치풍자, 사회비판을 능숙하게 버무리며, 무거운 주제를 B급 유머와 함께 전달합니다.
형식적으로도 TV 드라마라는 제약을 뚫고, 영화적인 구성을 시도합니다.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구성, 인터뷰 형식의 서술, 간헐적인 과장 연기 등은 마치 사회 실험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시선처럼 관객을 이끕니다. 이 방식은 이후 박찬욱 감독이 자주 사용하게 되는 ‘관객과의 거리두기’ 연출의 시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집단 맹신’과 ‘대중 조작’**을 미디어와 결합해 비판합니다. 찬드라를 둘러싼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고, 결국 진실보다 ‘믿고 싶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박찬욱은 이 장면들을 통해 인간이란 얼마나 비이성적인 존재인가를 조롱하면서도, 그 안에 씁쓸한 현실 인식을 담아냅니다.
외계인보다 더 기이한 인간의 본성
이 작품에서 찬드라는 무언가를 ‘설명’해주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침묵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신념과 세계를 구성합니다. 찬드라가 무슨 뜻으로 행동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의 해석과 그에 따른 행동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를 통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위안이 필요할 뿐인가?”
그렇기 때문에 『찬드라의 경우』는 외계인 영화가 아닙니다.
인간 영화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 믿음, 공포, 그리고 집단적 광기.
이 모든 것은 찬드라라는 빈 껍데기에 투영되며,
결국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말에 열광하고 망가져가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의미 있는 이유는, 여전히 우리는 수많은 '찬드라'를 향해 믿거나 말거나의 태도로 바라보며, 진실보다 위안과 자극을 택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박찬욱이 그린, 진짜 외계인은 ‘우리’였다
『믿거나 말거나 – 찬드라의 경우』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는 작품입니다. 외계인이라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심리, 사회 구조, 믿음과 조작의 메커니즘은 시간이 지나도 유효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초기 실험정신과 풍자미학이 농축된 이 단편은,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유쾌하면서도 불편하고, 웃기면서도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는 건 외계인이 아닌 ‘인간’ 그 자체입니다.
믿고 싶어서 믿고, 의심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감는 우리.
진짜 외계인은 찬드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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